한겨레21 96/10/30자입니다.
미래 정보화사회의 노동운동, 그 희망의 근거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노동조합 활동하기가 어렵다고들 한다. 얼마 전, 포항지역 노조 간부들을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임기가 끝나면 다시는 노동조합 간부 는 안 하겠어. 노조 간부 1년 동안 남은 것이라곤 위장병하고 빚 2백만원 밖에 없다고. 매일 회의다, 교육이다, 연대모임이다 뭐다 해서 집에 늦게 들어가야지… 마누라한테 바가지 긁히지… 회사에서는 팍 찍혀서 죽어라 뛰는데 조합원들은 안 따라주지. 이 짓을 누가 하겠느냐고.”
노동조합 간부 못해먹겠다?
모두들 동의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지금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언제와 비교해볼 때 그렇다는 말인가. 87년, 88년 무렵과 비교할 때 그렇다는 말이다. 암흑의 세월 80년대, 그리고 그보다 더 이전 군부독재가 서슬 시퍼런 ‘긴급조치’, ‘유신’으로 상징되던 시절, 우리는 지 금처럼 밝은 대낮에 ‘노동조합’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노동조합의 ‘노’자조차 어두운 골방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여야 했다.
오죽 했으면 많은 사람들이 ‘노동조합은 이제 이 땅 위에서 더이상 적합한 운동틀이 아니다’라는 인식에 동의했겠는가. 현장으로 들어간 수만의 ‘위장취업자’군이 어렵게 어렵게 몇 개월 동안 버티며 소모임을 하나 만들면 그 소모임 활동 속에서 ‘노동조합’이나 ‘임금인상’이나 ‘근로조건 개선’ 등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결론지었겠는가 … 화장실에 낙서 하나를 하더라도 맞바로 ‘코쟁이’나 ‘대머리’를 공격하는 내용이어야 한다고 다짐했겠는가… 소모임 단위의 비합법 정치투쟁이 유일한 대안이었겠는가…
분단의 벽이 두터운 우리나라에서 ‘노동조합으로는 더이상 어렵다’는 판단은 한때 거의 대부분 활동가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에는 그에 대한 이견이 별로 없었다. 다만, 우리 싸움의 주요 대상이 ‘코쟁이’이어야 하는지, ‘대머리’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그야말로 우리끼리 머리가 터지게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다, 어렵다’ 한들 87년 이전의 세월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현재의 상황이 극히 어려운 여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80년대 10년 넘는 세월 동안 노동현장에서 피땀을 흘린 수천, 수만 노동 운동가들의 힘이 지금 어디에서 어떤 흔적으로 남아 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노동현장에서 피땀을 흘리다가, 감옥을 자기집처럼 들락거리기도 하다가, 죽지 않을 만큼 얻어터지기도 하다가, 피가 마르는 토론으로 수많은 밤을 지새운 10여년 세월을 뒤로 한 채, 다시 책을 붙들거나, 월급쟁이가 되거나, 자격증 고시에 매달리는 수만명의 현재와 미래는 어찌 보면 지난 시기의 눈물겨운 삶과 잘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는 그들이 만든 것이다. 지금의 소위 ‘문민정부’, 지금의 노동조합, 지금의 민주노총, 전직 대통령을 두 사람씩이나 감옥에 집어넣은 지금의 국민정서는 모두 그들의 몫이다. 그들의 그 지난한 삶은 지금 잠시 보이지 않을 뿐이지 거대한 강물을 이루어 우리 정서 밑바닥에 흐르고 있다. 그 정서가 지금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추운 겨울 두껍게 얼어붙은 강물 밑으로도 강물은 흐르고, 그러다가 봄이 오면 그 물은 얼음을 녹이고 다시 출렁이는 강물처럼 우리 앞에 나타나게 마련이다. 87년, 88년의 노동자 대투쟁에서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어머니 40년 ‘전평’비밀 들을 때…
따지고 보면 암흑의 긴 터널이었던 80년대보다 더 어려운 시기도 우리에게 있었다. 87년 7, 8월 노동자 대투쟁이 있던 해 가을 어느 날 저녁, TV 뉴스를 보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동안 말은 안 했지만, 사실은 내가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활동을 했지. 40년이 넘도록 아무에게도 말을 못했지만… 사실은 내가 전평 활동가였지. 그때 나와 같이 일하던 사람들은 어느 날 깨어보면 한강변에 시체로 떠오르기도 하고 간밤에 죽창에 찔려 죽기도 하고 그랬지. 그래도 다들 열심히 했지.
6 5사변 때에는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모두 다 죽고 나혼자 운 좋게 살아남았지. 다들 너보다 훨씬 똑똑하고 잘생긴 아까운 사람들이었지. 니 애비한테도 여지껏 말을 못했지만, 사실은 내가 전평 활동을 했었지.” 칠순의 노파가 40년 동안 살을 맞대고 살아온 남편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던 사실을 감히 고백하도록 하는 용기, 그것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칠순의 노파로 하여금, 40년 동안 간직했던 비밀을 감히 털어놓을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세상, 바로 그 세상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반만년 역사를 통틀어 지금처럼 훤한 대낮에 노동조합을 마음놓고 말할 수 있는 시기는 일찌기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내가 “노동조합 간부님들은 다 구속되었다”고 힘없이 말하는 노조 간부에게 “위원장님들은 다 사형 당했소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이냐”고 위로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사회를 정보화사회라고들 말한다. 아직은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른바 정보화사회에서는 고학력, 고숙련, 고임금 노동자가 갈수록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고학력, 고숙련, 고임금 노동자가 증가하고 노동자들의 정서는 갈수록 개별화되고, 새로 취업하는 신세대 노동자들은 아예 ‘조직당하는 것’을 마음속으로부터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노동조합의 조직률은 계속 떨어지고 있는데 무슨 노동운동이냐 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제 노동운동은 물 건너 갔고 좌익은 끝났다고 생 각할 수도 있다.
외국 유수 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직원들의 얼굴이 슬로 쓻으로 차례차례 등장하는 어느 대기업의 이미지 광고가 있었다. 그 광고를 좀 다른 측면에서 보자. 박사학위를 받은 그들도 분명히 ‘노동자’이다. 전문직 노동자, 두뇌 노동자, 화이트 칼라, 골든 칼라, 소수 특권층 노동자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도 자신의 고급 노동력을 판매하고 임금에 의지해 생활하는 노동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잠시 특권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노동자들은 언제나 존재했다. 매뉴팩처시대에 ‘장인’으로 불리우던 수공업적 노동자가 그랬고, 생산에 투입된 기계가 수공업적 노동자의 특권을 박탈한 뒤에는 그 기계를 조립하는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그랬다. 인류의 역사는 특권을 누리던 일부 노동자의 특권이 계속 박탈되어가는 과정을 되풀이 했던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이른바 ‘정보화사회’로의 이행도 이러한 변화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볼 수는 없을까? 그들은 이미 스스로 즐겁게 착취당하며 밤 늦게까지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정보화 사회 ‘노동운동’의 가능성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7~8년 동안 현장에 종사해온 노동자와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취업한 고학력 노동자의 생활이 겉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본다. 고학력과 고숙련이 곧 사회적 특권을 의미한다는 불변의 등식이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두뇌노동과 육 체노동의 대립적 양극화가 완화되는 이 기묘한 현상에 직면하여, 우익의 낙관론자들은 노동의 숙련화를 즉각 노동자의 권력 상승으로 등치시킨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노동자의 복지가 향상되어 고학력, 고숙련 노동자와의 차이가 좁혀지는 것 또한 낙관론으로 전망한다.
한편 반대로 탈숙련화의 계속적인 심화를 아직도 집요하게 도출하는 전통 좌익들도 있다. 고도의 숙련이 요구되는 노동과정도 조만간 탈숙련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리라는 것이다. 생산과정에 기계가 투입됨으로 해서 숙 련 노동자의 탈숙련화가 초래되었던 것처럼, 정보화사회 고학력, 고숙련 노동자 역시 새로운 기술에 의해 조만간 탈숙련화 과정을 거칠 것이고 그 것은 곧 노동자의 탈권력화를 결과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을 가만히 보면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고숙련을 요구받고 있으면서도 숙련된 노동자의 특권은 숙련에 비례하여 상승하지 않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옳겠는가. 분명한 것은 이 기묘한 현상이 바로 새로운 정보화사회 노동운동의 토대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민주노총의 권영길 위원장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특권을 상실해가는 고숙련, 고학력 노동자의 처지가 장래 노동운동 속에서는 희망이 되는 것이다. 이 현상에 적절히 조응해나갈 자신이 없다면, 물론 노동운동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